












2015년 12월 31일.
또 한 번 해가 저물고 또다시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우리는 지금――.
"루이, 다녀올게."
"소장님, 다녀오겠습니다!"
공항.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네 소장님 아니지 않아?"
"에이~ 한번 소장님은 영원한 소장님이죠~ 그쵸, 소장님~?"
"여권이랑 휴대폰, 지갑은 챙겼나?"
"그 질문 아까도 했던 거 같은데."
"이, 이번엔 확실히 챙겼다구요!"
"그렇다네. 물론 나도 다 확인했고."
캐리어도 다 맡겼으니, 이제 정말 몸만 들어가면 된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공항에만 오면 엄청 불안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괜찮은 것 같네. 이유 모를 불안함에 이유가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내가 단순히 비행기를 타는 걸 무서워했나 싶었는데 그 사건 때문이었다니. 시간이 지나고 공항의 모습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장소들이 있으니까 은연중에 그 사건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이미 15년도 더 지난 일인데… 음, 어렵네. 아주 어려워.
"하루키, 괜찮나?"
"어? 아."
내 친구는 눈치도 빠르지. 표정관리 표정관리~ 저건 내가 이소이 사네미츠…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걸 걱정하는 물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대해선 믿는다고 했었으니까. 예전에는 대충 얼버무려 대답해서 넘겼던 것 같지만, 진실을 알고 나게 된 후에는 더 이상 떨리지 않게 됐다. 그러니까….
"응, 괜찮지. 문제없어. 이제 들어갈 시간이네."
"아앗, 벌써 시간이! 기념품 사 올게요, 소장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겠습니다."
"음."
우린 루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루이는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돌아갔다. 그다음은 모든 승객들이 거치는 보안검사와 출국심사를 하고, 면세점은 시간이 늦어 문을 닫아서 패스. 그래도 편의점은 열려있어서 시나노가 오뎅탕을 하나 사 먹었지. 곤약 하나 얻어먹고. 그리고는 탑승구 앞 의자에서 시나노와 시답잖은 잡담을 하면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걸 지켜보다 보니 탑승 시간은 빠르게 다가왔다.
비행기 안에서는… 뭔가 해보려고 했지만 이륙할 때 시나노랑 같이 창밖을 본 거 빼고는 뭘 한 게 딱히 없네. 자다 일어나서 기내식 먹고 뒤에서 스트레칭 좀 하다 다시 잔 기억이 대부분이다. 비행시간이 긴 만큼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소모가 심해서 컨디션 조절에 집중했다. 시차적응 자신 없으니까 말이야.
참고로 시나노는 만반의 준비해왔다며 미리 다운로드 해온 '마법소년 디타와 신의 검'(덕분에 제목 외웠다)을 다시 보고, 테이블을 보니 간식도 까먹은 것 같고, 시간을 알차게 보낸 것 같다. 혼자 비행기 타기 싫다고 굳이 도쿄에서 나고야까지 와서 같이 비행기 탄 것치고 나없이도 알차게 놀고 있지 않나? 뭐, 다행이지만.
"죽겠다아아아!"
"……이하동문."
아무튼 이탈리아 도착. 출국장을 나가니 레이지가 꽤나 멋진 포즈로 서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시나노는 레이지를 발견하자마자 '레이지 씨~'를 외치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레이지도 그런 시나노에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전부터 느끼고 있지만 둘이 사이 너무 좋지 않아?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야? 조금 소외감 느껴질지도?
뭐, 농담이고 둘이 친해 보여서 나도 기쁘다.
"어서 오세요, 시나노 씨. 그리고 형."
"내가 두 번째로 불릴 줄은 몰랐는데~"
"분발하셔야겠네요, 아토 씨~"
"크케케케~"
자연스럽게 우리의 짐을 들어주겠다는 레이지에게 괜찮다며 손을 휘휘 젓고 레이지의 안내에 따라 차로 이동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뒷좌석에 타자, 운전석에 탄 자는 자신을 드레퓌스 츠바이크라고 소개해왔다. 이야기 들은 적 있다. 레이지와 아버지가 소속된 LDL 멤버이자 출판사 소속으로 아버지 원고 독촉도 맡고 있다고 말이야.
츠바이크 씨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지내는 동안에 각자의 의뢰로 자리를 비울 예정이니 편히 지내라고 한다. 더불어 우리에 대해서 계속 궁금했었다는 말도 덧붙였고. 레이지는 집에 세오 씨와 스승님도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다며, 두 분 다 좋은 분들이라고 한껏 기쁜 티를 냈다. 레이지도 들떴구나.
지금 가는 곳은 일단 아버지와 레이지 집으로 알고 있다만, 레이지는 츠바이크 씨의 말에 위화감도 전혀 못 느끼는 것 같네. 신뢰라고 해야 할지 관계의 익숙함이 느껴진다. 세오 씨는 저번에 봤던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사람이자… 일 거고, 스승님은 그 주황빛 머리의 여성이겠지. 레이지가 보내준 LDL 단체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 * *
집에 도착하니 집 앞에는 레이지가 말한 세오 씨와 스승님이 나와 있었다. 짐을 왕창 들고 서 있는 걸 보니 아마 우리와 인사를 마친 뒤, 바로 츠바이크 씨 차를 타고 이동할 모양이었다. 나와 시나노는 차에서 내리면서 인사를 하고, 그들은 환영인사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레이지가 중간다리 역할을 해줘서 짧게 자기소개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쪽이 일정이 있다 보니 이야기를 길게 하진 못했다. 이맘때쯤이 대목이라나. 세오도아 씨와 앨런 씨는 다음에는 더 길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등의 말을 하며 빠르게 차를 타고 떠나갔다.
응, 이번엔 좀 충동적인 여행이 되었다만, 다음에는 제대로 이야기해서 일정 맞추고 와보자.
"아버지, 우리 왔어요."
"어, 응, 어서와, 레이지! 그리고 하루키, 시나노 군!"
참고로 이소이 사네미츠, 아버지는 세오도아 씨와 앨런 씨 뒤에서 어째서인지 내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초대하지도 않은 놀이공원까지 따라오던 뻔뻔하고 여유넘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저런데. 나는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 마침 옆에 있던 시나노에게 눈치를 줬다. 자, 가라, 시나노.
"??"
"……."
음, 실패했다. 아니, 스스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미루려고 한 내가 잘못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어? 아아! 물론, 물론이지! 자자, 다들 들어와! 여기가 우리집이야!"
엄청 긴장했네. 누가 잡아먹는댔나.
아버지가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가자 마자 느낀 감상은 일단 '밖에서 봤을때도 느꼈지만 상당히 큰 집이네'였다. 하지만 거실로 이동하자마자 '아니, 상당히가 아니라 엄청 크잖아?'로 감상이 바뀌었다. 이 너머에 드디어 아버지랑 레이지 방이 있다고? 아까 거기는 창고랑 화장실이었다고?
"집 엄청 커요…."
"거실 크기가…."
"자자, 어서 짐 들고 따라오세요. 밥도 먹어야죠."
소시민인 내가 봤을 때는 거의 꿈의 집이다. 레이지 말에도 우리가 넋을 놓고 있으니, 레이지는 실례합니다~ 라며 우리 등을 밀어 자기 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자기랑 아버지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짐 풀고 나오라면서 문을 닫고 나가버리는데, 사실 레이지 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 호기심이 동해서 방 둘러보기 바빴지.
"레이지, 엄청 깔끔하게 살지 않아?"
"저 반성하고 있어요."
책상도 책장도 어찌나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지. 딱히 손님이 오기 때문에 치운 느낌이라기보단 평소에도 잘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순수하게 감탄했다. 시나노는 만화책을 발견하자마자 작품 라인업을 구경 중이고, 나는 음, 아버지 책이 꽂혀있는 책장을 봤다.
내가 아는 한, 아버지의 책을 읽은 건 지고천연구소에서 본 게 처음이다. 그전까지 하라다 미노루도, 이소이 사네미츠도 모르는 사람이었지. 그러니 내가 모르는 이소이 사네미츠의 책이 있다는 건 당연한데, 대충 훑어봐도 이 책들은 내가 아버지와 떨어진 이후에 나온 책이라… 어쩐지 기분이 묘해진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맛있는 냄새가 나요."
"아, 이런. 레이지가 저녁 준비한다고 했지. 방 구경할 때가 아니었네."
"저 일단 대충 짐은 풀었는데, 아토 씨는요?"
"난 뭐 크게 풀 짐도 없어서. 나가자, 레이지 도와주러."
"좋아요!"
복도로 나가니 음식 향기가 확 풍겨왔다. 거실로 나가니 레이지가 그릇에 음식을 담고, 아버지가 세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음식 양도 종류도 많았는데 이걸 그 단시간 내에 했을 리는 없고?
"좋은 타이밍에 나오셨네요. 다들 앉으세요."
"설마 이거 레이지 씨가 다 만든 건 아니죠?"
"제가 다 만들었다고 한다면?"
"에엥? 진짜요?!"
"설마요. 츠바이크 씨랑 세오 씨랑 스승님한테 도움을 받았어요."
"…아버지는?"
"아, 나는, 그, 그러니까…."
"아, 아버지는 마감이 있으셔서, 그, 이맘때가 대목이라. 꽤 의뢰를 받으셨거든요."
"흐응~ 그렇구나~"
"아토 씨, 무서운 표정~"
"뭐, 장난이니까."
"…놀랐다아아."
"반은 진심이었지만."
"미안합니다…."
어쩐지 최근에 대화하면서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 나는 봉골레 스파게티를 좋아한다, 혹시 싫어하는 음식이 있냐, 알러지는 없냐, 이런 걸 묻길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로 거창하게 해줄 거라곤 생각 못했네.
스프에 빵은 기본이고, 당연하게 레이지가 좋아하는 봉골레 스파게티가 올라오고, 겉이 바삭하게 잘 익은 애플파이에 이탈리아니까 피자 기대하시겠죠? 같은 말을 하면서 피자도 놓이고, 새해 기념으로 먹는 거라며 렌틸콩 위에 올려진 소세지도 놓이고, 아버지는 그새 와인도 한 병 꺼내왔다.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진수성찬이었다.
"갓 만든 음식들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을 거예요."
"나는 잘 못하지만 다들 요리를 잘하거든. 레이지도 어느 정도 하고."
"기대되네요!"
"자, 저도 앉았으니까 이제 먹어봐요."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하지만 음식이 맛이 없더라도 즐거웠겠지.
결국 연말에 사람들이 들뜨는 이유는 연말을 핑계로 서로 만나 함께 하는 시간이 생긴다는 게 기쁜 거니까.
내 연말은 어릴 때는 할머니, 토모코 씨와 보내고, 거기에 루이가 함께 하다가 이후에는 아예 오토와 가와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올해도 당연하고 익숙하게 오토와 가와 보내겠거니 생각했지만, 오토와 가에서 먼저 이번 연말은 이탈리아에 가서 지내는 게 어떠냐고 제의해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님이 루이에게 먼저 언질을 줬고, 루이가 그 말에 동의해서 나에게 전달해줬지. 감사하게도.
마음의 결정이 끝나고는 루이와 아버님께 배려해줘서 감사하다며 다녀오도록 하겠다고 연락하고, 한동안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지. 그때까지 아버지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아 버리는 바람에. 사실 연락하면 그만인 일이긴 했는데… 아버지가 답장이 오기까지 2개월이 걸렸던 게 앙금으로 남아 심술부리던 게 습관이 됐다.
보통 레이지를 통해 내 안부를 보내고, 내 안부를 들은 아버지가 연락이 오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정도였지. 아주 연락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소통에 문제도 없었고 또 막상 갑자기 연락하려니 어색하다는 생각에 그냥 넘기다 보니 이렇게 된 거라, 음, 일단은 나도 반성했다. 레이지한테 부담이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아버지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문자보다는 말로 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 전화를 했고, 덕분에 무슨 일 있냐며 당황한 아버지 목소리도 생생하게 들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연말에 이탈리아에서 지내겠다는 내 말을 들은 아버지였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전화 너머로 아버지 책상 위 물건이 미끄러져 쏟아지는 소리가 엄청났다. 그 후에 문 열리는 소리랑 함께 이탈리아어가 들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츠바이크 씨 목소리였던 것 같네.
"…키 씨, 형."
"…레이지. 뭐라고 했어?"
"형에 반응하네요~!"
"아, 미안. 조금 멍하게 있었네. 여독이 남았나 봐. 밥 먹고 집 구경시켜준다고 했었지? 자정쯤에는 옆 공원에 잠시 갔다가, 돌아오면 다 같이 거실에서 이불 깔고 자자, 이 일정 맞나?"
"그래도 다 듣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탐정이니까."
"그거 관계있어요?"
"형이 그렇다니 그런 걸로 넘어가 줍시다."
* * *
밥도 다 먹었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들을 치우고 설거지를 시작하려니 아버지가 우당탕탕 뛰어와서 설거지는 자기가 할 테니 레이지랑 집 구경이나 더 하라고 복도로 쫓겨났다. 아버지나 레이지나 하는 행동이 똑같네. 레이지가 누굴 보고 자랐는지 보인다. 기분이 묘하네. 아버지 같은 사람을 보고 컸는데 이렇게 잘 자라다니.
아, 이런 말은 좀 심했나? 근데 난 해도 되지 않나?
"제 방은 보신 것 같고, 아버지 방 보실래요?"
"응, 좋지."
참고로 시나노는 홀랑 레이지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쉴 겸 레이지방에 있는 만화책도 읽고 싶고, 레이지 줄 디타검 자료들을 들고 왔다면서 정리하겠다고. 나랑 레이지가 같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하는 게 빤히 보였지만 감사히 넘어가 줬다. 점점 훌륭한 후배로 크고 있어 뿌듯할 정도군.
"…번잡하군."
"그래도 형이 온다고 치운 거니까요."
"노력에 가산점은 줄게."
이맘때가 대목이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이곳저곳에 자료가 널려있는데,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해서 그냥 정리한 것처럼 보이게 책을 반듯하게 쌓아둔 느낌에 가까운 느낌이다. 쓰레기통에도 버려진 원고가 보이고, 양을 보니 한번 비우고도 쌓인 느낌인데, 마감은 친 거겠지? 츠바이크 씨에 대한 어떤 소문을 들었다만.
"소감이 어때요?"
"소감이랄 것까지야. 그냥 평범한 방이네. 아버지 같고."
아버지에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말을 하나 싶긴 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사실 저도 하루키 씨, 형 방에 갔을 때 그렇게 느꼈어요."
"그랬어?"
"그렇더라구요. 그냥 이 사람이 살아온 궤적이 방에서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하긴. 방을 꾸리는 사람은 결국 방 주인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네."
슬슬 내 방이 어땠나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난 그래도 나름 깔끔하게 산다고 자부하…나? 루이가 놀러 오면 치워주고 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는데 관계없겠지? 그래봤자 지금 시점에서 늦었지만….
"좀 뜬금없는 소리 해도 돼?"
"언젠 안 하셨나요? 하세요."
"사족을 붙이네~ 별 건 아닌데, 여기 와서 느낀 게 있어."
"뭔가요?"
"왜 너도 아버지도 내 집이나 회사, 주로 다니는 길… 그런 걸 보고 싶어 했는지 알겠더라."
"…아. 저도요. 저도 형이 왜 우리를 이곳저곳 데려가고 싶어 했는지 알겠더라구요."
"둘이 이곳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사소한 거라도 궁금해지더라고."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좋은 곳을 많이 보여드리고 싶어지게 되네요."
나와 레이지는 훈훈한 시선을 나눴다. 아니, 근데 이 시선은 역시 연장자인 내가 보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조금 더 아버지 방을 서성이다 방을 떠났다. 뭐, 가정방문이니까. 사건조사 같은 게 아니니까. 충분히 봤다.
그다음은 레이지 방에서 정말 만화를 보며 히죽거리고 있는 시나노를 끌고 나와서 같이 거실 구경, 설거지하는 아버지 구경(벅차 보이던데 어떻게든 해내고 있더라), 창고 한번 열고 화장실 사용법 듣고. 안내 한마디에 잠답 열마디씩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그사이 아버지는 설거지를 끝내고 소파에 기대서 손 흔들고 있었고.
"그새 옷 챙겨입었네요?"
"시간이 다 되어가니까 나가야지."
그때 봤던 익숙한 코트와 머플러 차림이다.
우리는 옷을 껴입고 함께 집을 나섰다.
* * *
길거리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폭죽 터지는 소리 같은 게 나더니….
"와~!"
"불꽃놀이구나."
"이탈리아에서는 새해맞이에 불꽃놀이를 해요."
"우리도 참가하려고 공원을 가는 거고."
"저희 마을은 좀 소박하게 즐기긴 하지만요."
"저희도 비슷한 거 해요! 사람이 많아서 몇 번 가보진 않았지만!"
"나도 루이 따라 몇 번 가보긴 했는데 둘 다 녹초가 됐었지."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레이지가 손에 하나씩 뭔가 쥐여줬다.
"스파클라예요."
"오랜만이다!"
"이 나이에 이런 걸 하네."
"하하, 나도 하는걸."
"왕창 샀으니까 꺼지면 말해요."
레이지는 라이터를 꺼내 우리 스파클라에 하나씩 불꽃을 붙여줬다. 시나노는 그런 레이지를 돕겠다고 추운 날씨에 굴하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팔을 벌려 바람을 막아냈고. 쿵짝이 잘 맞는구나.
반짝이는 빛과 함께 타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넷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기 손에 든 반짝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다 불꽃이 꺼지고 나서야 정신이 들어서 우리 집중력 너무 좋은 거 아니냐면서 웃었다. 시나노가 이런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죄다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기에, 두 번째 불꽃을 켰을 때는 사진 찍느라 바빴다. 나랑 아버지를 먼저 붙여 사진 찍게 만들더니, 그다음 레이지를 붙이고, 레이지에게 폰을 맡긴 시나노가 또 나한테 뛰어오고. 그러다 불꽃이 꺼져서 다시 켜서 또 찍고 찍고.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다 돌려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있으니 아마도 이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레이지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레이지는 들고 있던 스파클라를 나눠주면서 덕담(추정)이 오갔다. 시나노는 붙임성 있게도 그사이 껴서 자기가 레이지 친구라고 인사하면서 말도 주고받고 있고. 이탈리아어 못하는 걸로 아는데 대단하잖아.
"……아버지."
그리고 나는 그 틈에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는 그런 레이지와 시나노를 웃는 얼굴로 보고 있다가,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하루키."
웃는 얼굴은 웃는 얼굴이되, 좀 더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는 대답해왔다. 나는 레이지와 시나노가 보일만한 거리에 있는 공원 의자에 앉아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내 옆에 간격을 두고 앉았다.
"아까 설거지 같이 하지 그랬어요."
"응? 아, 그거야 손님…."
"손님에게 설거지를 시킬 수 없다, 라고 말하려고 했다면 다시 생각해보고 말하세요."
"……그렇네. 손님이 아니지."
"네."
"그래, 다음엔 같이 하자."
"응."
잠깐 침묵.
"그러고 보니, 오토와 씨는 괜찮다고 했어?"
"루이요? 루이가 왜요?"
"연말은 오토와 씨네 가족분들이랑 보냈다고 들어서…."
"아."
관련해서 묻질 않길래 거기까지 신경 쓰지는 않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구나.
음, 루이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역시 고민을 많이 했다. 이제까지 오토와 가에 그렇게 신세 져놓고 다른 가족이 생겼다고 떠나다니. 너무 배은망덕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대답을 유예하기 시작하자마자 루이에게 불려가서 깊은 대화를 나눴지. 루이에게 들은 말을 정리하면 이랬다.
고민이 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야 할 때다. 어색하다고 느낄 때 가야 다음에 또 갈 수 있다. 나도 우리 가족도 네가 이탈리아 간다고 서운해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연말에 네가 없어서 좋다는 의미는 아닌 것 정도는 알리라 생각한다. 그분들도 너를 반길 거다. 우리는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 여차하면 다음에는 함께 보는 것도 좋겠지. 부담가지지 말고 다녀와라. 참고로 연차 남았을 경우만 유급 연차다.
"…참나. 당연하지. 오히려 응원해줬어요."
"그러냐."
"다음에는 아버지랑 레이지가 오세요."
"오냐."
"루이네 가족도 소개해줄게요."
"그래."
잠깐 침묵.
"아버지, 아직 내가 어색하죠."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너무 놀라지 않으셔도 돼요. 문자로는 얼마든지 이야기해도 막상 만나니까 또 어색한 거죠? 오늘 저랑 아버지가 한 대화를 되짚어보면 알 수 있어요. 뭔가 실수할까 긴장하고 조심하다가 말수가 줄어든 게 보이는걸."
"……하하, 탐정 어디 안 가네."
"아토 하루키는 오토와 탐정사무소의 유능한 조사원이니까요."
"…미안하구나. 면목이 없네."
"뭐, 아니에요. 걱정마세요.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겠죠. 더 알아갈 시간이 필요해요."
"응……."
"쭈그러들지 마세요. 허리 펴시고."
"앗, 응."
"그러니까 잘 부탁해요."
손을 척 내밀었다. 아버지는 역시 바보 같은 표정으로 내 손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내 손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숙이려다 허리를 펴고 내 손을 맞잡았다.
"……나도. 못난 아비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아들."
"친하게 지내요."
"……넌 정말 훌륭하게 컸구나."
"됐어요. 악수나 해요."
아버지의 코끝은 아까보다 빨개져 있었다. 추위 탓은 아닌 것 같았다.
"이야기 끝나셨어요?"
"와, 레이지 씨 통역 멋있더라구요!"
"저야 여기 현지인이니까요."
"그래도!"
"자자, 시간 다 되어가니까요. 우리도 큰 거 하나 쏘아 올리죠."
* * *
우리는 공원의 많은 사람과 어울려 함께 카운트 다운을 했고, 공원 시계가 정각이 됨과 동시에 레이지가 쏘아 올린 불꽃이 하늘 위에서 펑 소리와 터졌다.
"Happy New Year~!"
"Felice anno nuovo~!"
"아, 치사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길."
우리의 작은 불꽃은 저 멀리 높은 하늘로 오르진 못했지만, 새로운 한 해를 축하하고 우리를 즐겁게 하기엔 충분히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역시 오길 잘한 것 같아요."
"그거 안심되는 소리네."
"남은 일정도 재미있게 보내죠."
"찬성!"
"힘내겠습니다."
2016년 1월 1일.
또 한 번 해가 지나고 또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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