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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성탄절을 맞아 거리마다 함성만큼의 캐럴이 터져 나왔다. 조잡한 전구 장식을 문마다 걸어둔 가게가 이벤트와 선물 성 상품을 내세우며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호객 행위를 겨우 뚫고 지나친 하루키가 길 구석의 모퉁이를 한 바퀴 돈다. 날씨가 몰라보게 추워졌다. 내년이 가까워졌다. 연말의 설렘을 거의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하루키는 내면의 성장을 감지한다. 자라난다는 건 오래 쓴 연필심처럼 뭉툭해진단 뜻인가……. 서른은 적지 않은 개념이나, 하루키는 이제 나이가 훌륭한 어른임을 증빙할 수 없음을 안다. 이조차도 하나의 숫자이며 세월이 마냥 성숙을 길들이지 않는단 걸 알았을 때 그는 조금 막막해졌다.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많았다. 골인 지점이 멀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헤매야.

 

“아토 군.”

 

무거운 생각을 헤엄치던 중 낮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하루키를 불러 세운다. 목도리를 단단히 두른 쿠라치 테루미가 정장 차림으로 손을 흔든다. 하루키는 약속의 당사자를 맞아 미끄러운 도보를 부지런히 걷는다. 들고 있는 쇼핑백이 시계추처럼 움직이다 제자리를 찾았다.

 

가장 평범한 삶

w.육참골단

 

“다들 바쁘다니 아쉬울 따름이야.”

“연말이라 그런지 업무나 약속이 많이 밀렸나 봐요. 연초에는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하니까요.”

 

침음으로 수긍한 테루미가 정장 자켓을 벗는다. 빈 좌석에 놓인 외투에 매달린 단추가 위태롭게 자라를 지키고 있다.

 

연말을 맞이해 계획한 식사 자리는 불참자가 많아 적막했다. 하루키는 멋쩍게 스웨터의 목깃을 끌어 내려 숨을 돌린다. 쿠라치 테루미는 과연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이지만, 하루키의 두 배 가까이 살아온 그와 알맞은 화제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연륜은 식사 자리에서도 발휘된다. 훨씬 어린 하루키에게도 식사 준비를 강요하지 않는 다정은 같은 중년 남성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제가 할게요. 우롱차가 든 물병을 받아가는 하루키에게도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건넨다. 하루키는 당연한 일이라며 웃는다. 그럼 테루미는 단호하게 답한다. 아토 군,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선의에 당연함이란 없네. 감사한 마음은 전할 수 있을 때 전해야만 하지. 그 말에서는 그의 행적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주변에서 들어왔을 평가까지도.

 

두 사람 앞에 나란히 두 개의 소바 그릇이 놓인다. 올해의 마지막에 따뜻한 메밀 소바를 먹자고 제의한 사람은 테루미였다. 경찰 일이 바빠진 이후로는 새해에 토시 코시소바年越しそば를 제때 챙겨 먹는 것이 어려워져, 다음 연도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연말에 먹게 됐다고 했다. 본래 예정되어 있던 정찬 요리와 비하면 초라한 메뉴였으나 하루키는 거절하지 않았다. 인원이 줄어든 만큼 한 끼 식사가 과하게 성대할 필요는 없다. 의견이 통합되니 식당이 정해지는 것도 빨랐다. 도착한 가게는 연식 있는 건물로 운영해온 세월이 보였다. 따뜻한 김이 얼었던 손끝을 녹인다. 합장을 마친 하루키가 테루미에게 먼저 음식을 권한다. 나무젓가락을 뜯어 메밀면을 입에 넣은 테루미가 삼키고 나서야 하루키도 식사를 시작한다.

 

“또 한 해의 시작이네요.”

“세월이 참 빠르지.”

“정말요. 어른들이 왜 그렇게 얘기하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었는데.”

“아토 군이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 아닌가.”

 

글쎄요, 저는. 테루미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하루키에게 집중한다. 하루키는 소바 위에 놓인 새우튀김을 꾹 눌러 국물에 적신다. 떨어진 튀김 부스러기가 기름과 함께 둥둥 뜬다. 눅눅해진 튀김옷을 젓가락으로 누르자 새우가 반으로 갈라진다. 하루키는 다음 말을 잇기가 창피해졌다. 한탄할 상대를 잘못 찾았다. 공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친구나 후배가 좋았을 것이다. 이런 말이 그에겐 애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사회를 몸소 겪어온 어른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다. 망설이는 중에도 테 루미는 끈기 있게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인내가 깊다. 하루키는 말을 돌리기를 관두고 화제를 지속한다. “저는 아무래도 쿠라치 씨처럼 좋은 어른은 되지 못한 것 같아서요.” 테루미는 눈에 띄게 놀란다.

 

“그건 놀라운 고민인데.”

“하하…….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런 말을…….”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어. 실례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

 

테루미는 점잖게 넥타이를 매만진다.

 

“아토 군이 생각하는 ‘좋은 어른’은 뭐지?”

 

하루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가장 난해한 질문을 맞이한다. 담임 선생님과 나눈 장래 상담 이후로 이렇게 곤란한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다. 하루키는 죄를 지은 어린 애처럼 고개를 숙인다. 반면 질문을 던진 테루미는 편안한 얼굴이다. 소바를 질서정연하게 비워 나간다. 빠르게 그릇이 바닥을 드러내는 동안에도 하루키는 조용하다. 테루미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고 얘기하지만, 하루키로서는 그럴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좋은 어른은 뭐였더라. 사전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단어의 뜻을 머릿속에서 찾는다. 닮고 싶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첫 친우의 용기를, 그 가족의 다정함을, 기꺼이 친족을 흉내 내준 성씨의 주인을, 후배를 자칭하는 친밀함을, 무모하나 위하는 마음을 굽힐 줄 모르는 동생을 기억한다. 공통점이 없다. 나이와 관계 또한 없다. 고뇌가 길어진다.

 

부유하던 튀김 뭉텅이를 한입 물어 삼킨 하루키가 문득 얘기한다. 시간을 들인 가치가 없는 대답이 나온다.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 부끄럽지만, 나도 그렇다네.”

 

하루키가 젓가락 하나를 떨어트린다. 국물에 빠진 젓가락이 균형을 잃었으나 무사히 테이블 위에서 멈춘다.

 

“네?”

“나도 모른다고 얘기했다만. 아토 군이 나를 좋고, 훌륭하게 봐준다면 기쁠 따름이지만 부끄럽게도 난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지. 스스로 성장했다 느낀 적도, 자랐다고 느낀 적도 없어.”

 

그러니, 이런 말은 조금 낯간지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야. 나도 조금은 성숙해졌단 증거 아니겠어. 오십을 넘어도 칭찬을 노련히 받아들이는 법은 모르겠네.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만, 그래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아토 군이 생각할 계기를 줬다면, 그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군. 맑은 국물을 덜어낸다. 아토 하루키는 그의 이런 점을 동경하게 됐음을 새삼 떠올린다. 이런 면을 닮고 싶었다. 나이가 든다면 이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을 좋다는 말 외엔 표현할 방도를 모른다. 말을 활용하는 법을 좀 더 공부할 걸 그랬다. 생각하는 것을 완곡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좋았겠다. 쿠라치 씨는 과연 동경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소바는 식은 대로 맛있었다.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가게였다.

 

후식으로 주문하지 않은 밤 조림이 나왔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는 시기에도 찾아와주는 손님을 위한 소박한 감사 표현이라고 했다. 달짝지근한 설탕 결정 사이로 채 날아가지 않은 럼의 향이 훅 끼쳤다. 두 알의 밤까지 먹어 치우자 속이 뭉근했다. 계산을 마치고 먼저 가게 밖으로 나서는 테루미에게 감사의 인사를 반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산을 마친 카운터에서 가게의 점원이 밝은 얼굴로 외친다. 다음에 또 오세요! 중요한 걸 잊은 사람 같은 얼굴로 또다시 문장을 잇는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올해 크리스마스엔 눈이 내릴 것 같다는군.”

“그래서 그런지 점점 추워지네요.”

“그래도 기쁜 소식이야.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눈은 특별한 힘이 있다고들 하지 않나. 아이들도 좋아할 거고.”

 

만인에게 특별한 날이라 그런 걸까. 제 마른 손등을 매만지던 하루키가 한참 들고 다니던 쇼핑백을 테루미에게 내민다.

 

“별 건 아니지만, 성탄절이니까요.”

“……이런 걸 받을 줄은 몰랐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보답을 바라고 드리는 것도 아닌 데다가,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주 즐거운 식사 시간이 되었어요. 연말에 이런 시간을 보낸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테루미가 고개를 꾸벅 숙인 하루키의 어깨를 두드린다. 경력이 느껴지는 두꺼운 손이다.

 

“아토 군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테루미는 한 손에 쇼핑백을 든다.

 

내가 보는 아토 군은 누군가를 위하고 배려할 줄 아는 어른으로 보인다네. 그 연구소에 있을 때부터 줄곧 그랬지. 그렇지만, 아토 군. 좋은 사람이란 것은 꼭 상냥함과 본받고 싶은 부분으로만 구별이 되는 걸까? 좋지 않은 사람이란 건 어른이 될 자격이 없는 건가? 나이는 어디까지나 나이라면 성숙함은 어디서 비롯되는 건가? 연식이 들어도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유지한다면, 그건 올바르지 못한 걸까? 나는 이렇게 의문했을 때 더 나은 어른을 구분 짓는 일을 관두었어. 선망의 대상이 꼭 어른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관록의 무게란 무던한 세월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니까.

 

은퇴가 코앞까지 다가온 시기에도 세상은 흘러가고 일 처리가 확실하며 똑똑한 젊은이들은 수도 없이 나오지. 언젠가 그런 그들을 닮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 아토 군을 포함해서 말이야. 물론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나는 나일 수밖에 없었지만……. 문득 그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쿠라치 테루미를 쿠라치 테루미로 남겨 두는 것이 나쁘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거야. 아토 군은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은가? 좋은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나? 앞으로 긴 세월을 살 네게 이 말이 얼마나 와닿을지는 모르겠다만.

 

좋은 어른이 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보통의 사람으로, 보편적인 형태로, 가장 평범한 삶을 살다 보면 좋은 사람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선물은 정말 고마워. 잔소리가 많아 미안했네. 나이가 들수록 말수가 늘어나서 말이야.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야. 테루미의 충고에는 수많은 사과와 인사가 섞여 있다. 흘려들어도 좋다는 첨언을 마지막으로 쿠라치 테루미는 등을 돌린다. 테루미의 말을 저장하여 되새기던 하루키는 그의 이름을 불러 발걸음을 멈춰 서게 만든다.

 

“쿠라치 씨.”

 

낮은 구두 굽이 언 바닥 위로 반 바퀴 돌아간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쿠라치 테루미는 다음 말을 짐작한 듯, 주름을 깊게 드러내며 미소 짓는다.

 

“다음에 또 뵐게요.”

“그래, 연락하지. 아토 군.”

“네.”

“메리 크리스마스.”

“……네, 메리 크리스마스.”

 

하늘 위로 눈을 실은 먹구름이 낀다. 하루키는 테루미가 멀어질 때까지 연신 숙이던 허리를 바로 세우고 걷기 시작한다.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길 위로, 보통의 무게를 견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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