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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오전 4:11분

[자…?] 오전 4:11분

 

해도 뜨지 않은 새벽, 갑작스러운 문자와 전화 소리에 눈을 뜬 오토와 루이는 순간 자기가 잠이 덜 깼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기이한 문자였다. 그러나 대화 내역 최상단과 부재중 전화 목록에 찍힌 이름은 틀림없이 아토 하루키였고, 루이는 다시 잠드는 대신 안경을 끼고 일어나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루이가 일련의 기상 절차를 거치는 와중, 하루키는 오토와 본가 현관 앞에서 달달 떨며 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평생 허약하게 살아온 하루키에게 장시간 새벽 비행은 과하기 그지없었다. 덕택에 택시에서 내린 순간부터 그는 진동모드의 핸드폰처럼 경련하고 있었다. 본가 스페어키를 넘겨받는걸 극구 사양했더니 혼자 열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시간이 이렇다 보니 초인종을 울릴 염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루이의 방 불이 켜지는 모습에 환히 웃는 게 하루키의 최선이었다. 조난 신호라도 보내듯 팔을 휘적거린 하루키를 확인한 루이가 다시 커튼을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렸다. 보지 못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평상복 차림의 그가 낯설기까지 했다.

 

"……하루키.“

"물어볼 게 많은 건 알겠지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

 

나 죽을 것 같아… 웅얼거리는 모습이 막 잠에서 깬 루이보다도 초췌했다. 막 비행기에서 내린 마냥 한껏 구겨진 옷차림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이런 시간에 찾아오는 불청객에겐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교육 받았다만."

"이탈리아 와인 좋아해?"

"뇌물까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이는 첫 문장을 뱉을 때부터 몸을 틀어 지나갈 길을 만들어주었다. 밖은 추웠고 하루키는 곧잘 쓰러질 것처럼 생겼으니까. 냉큼 문을 넘는 하루키의 반대 손에는 공항에 바래다줄 때 봤던 캐리어가 그대로 들린 채였다. 허. 루이가 한쪽 눈썹을 살풋 치켜 올렸지만 일단 말을 아꼈다. 설명은 알아서 하겠지. 하루키는 현관에 캐리어만 남겨둔 채 망령처럼 비틀거리며 걸어 부엌으로 향했다. 어쨌건 귀신도 환상도 아닌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귀신이어도 저렇게 힘없진 않을 테니까.

 

"두 분은 주무시지?"

"그렇지."

"타구리는?"

"크리스마스에 잠시 왔다가 바로 돌아갔어."

 

어차피 위층에선 들리지 않겠지만, 행여나 깨울까 한껏 소리 죽인 대화가 오갔다. 불도 켜지 않고 의자에 앉아 식탁에 늘어진 하루키를 따라 들어온 루이가 식탁 등을 켰다.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주홍빛 등이 켜지자 은은한 색에 그나마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기억하는 세월 내내 부평초처럼 떠돌며 살았는데도 낯선 환경이 힘들긴 했던 모양이다.

익숙한 가구와 식기가 눈에 밟힌다는 사실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런 걸 보통 집이라고 하겠지. 그에게는 집이 세 개가 된 셈이었다.

 

"마실 거라도? 식사가 필요하면 남은 크리스마스 음식도 있다만."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루이가 권했다. 필시 라자냐와 식어버린 프라이드 치킨, 그리고 딸기 쇼트케이크의 얘기였다. 자식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크리스마스 상은 해가 갈수록 단출해졌지만 없으면 서운한 메뉴라는 게 있었다. 하루키조차 캐럴이 흘러나올 시기엔 치킨 정도는 살 정도로. 다만.

 

"음. 크리스마스 음식은 한 달간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더는 못 먹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어지던 명절 음식을 떠올리자 절로 낯이 창백해졌다. 표정을 본 건지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차밥은?"

"그건 좋네… 조금만. 매실장아찌랑."

 

냉장고에서 찬밥을 조금 던 뒤 전기 주전자의 스위치를 켜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차를 우리고 매실장아찌를 얹으면 간단히 완성이었다. 단출한 야식을 앞에 밀어준 루이가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괬다.

 

"그래서? 네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지, 하루키.“

"그게 말이야.“

 

따끈하게 데워진 그릇에 손을 녹이던 하루키가 어물거리며 눈을 굴렸다. 며칠 전, 하루키는 친가족과의 재회라는 문장에 한없이 관대해진 소장님 덕에 연말 휴가를 일주일이나 내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귀환 예정일은 이틀 뒤인 화요일이었고 루이도 이를 알고 있었다. 이르게 귀환 할 계획이 없었으니 연락 하나 남기지 않은 건 당연지사였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도 하루키는 별 생각이 없었다. 다만 크리스마스를 즐기던 와중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혹은 아쉬움이라고 불러도 괜찮다. 어 느 쪽도 맞는 말이었으니.

오랜 세월 그를 감싸주던 배려가 떨어지고 나서야 가시화되었다. 이전에도 오토와 가의 배려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저 막연하게 느끼는 것과 실제로 겪는 건 다른 법이다. 장시간의 비행과 8시간의 시차로 예민해진 마음은 아주 사소한 흠집도 두드러지게 가려냈고 그제야 하루키는 그들의 거대한 이해심과 마음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십몇 년의 세월을 혈연도 아닌 그를 받아준 사람들. 한 걸음 물러서 마주하는 순간 테두리 안의 순간이 그리워졌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래서 돌아오기로 했다.

그렇게 LDL의 멤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26일 새벽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26일 내라면 그럭저럭 크리스마스잖아,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며.

 

"…근데 말이지."

"음."

 

문제는 그가 해외여행에 있어서 완전히 초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비행기 시간을 계산할 능력은 가지고 있었으나…

 

"시차 계산을 까먹었지 뭐야…"

 

공항 도착 안내방송에 내다본 비행기 창 밖에 어두웠을 때 하루키는 당황하지 않았다. 새벽에 출발해 열 시간도 넘게 비행하니 저녁 시간인 건 예상 범위 내였다. 하지만 일본 시각으로 돌아온 핸드폰이 27일을 알리고 있는 걸 확인한 순간 힘이 풀려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래도 도착은 했으니 어쩌겠는가.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를 잡고 목적지로 향할 수밖에.

하찮은 고해성사를 듣는 루이가 수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하루키는 그가 이런 반응을 취하는 순간을 알고 있었다.

 

"웃지 마."

 

퍽, 다리를 걷어찼지만 숙인 고개나 입을 가린 한 손은 내려오지 않았다. 루이는 심지어 어깨마저 잘게 떨고 있었다. 됐다, 웃어라… 두어번 더 걷어찼지만 유의미한 반응을 얻어내는 데 실패하자 하루키는 자포자기하고 차밥이나 마저 먹었다. 묵묵히 그릇을 다 비울 즈음 루이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일정 변경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사과드리는 편이 낫겠군."

"그렇네, 제멋대로 결정해버렸으니까 말이야. 신경 쓰게 했을 것 같아."

"크리스마스는 재밌었고?"

"일본이랑 꽤 다르더라. 재밌었어. 음, 그 인간이 자꾸 내 눈치를 보지 않으면 더 나았을 텐데."

 

빈 그릇을 밀어내며 하루키가 투덜거렸다. '그 인간'이 아버지인 사네미츠를 부르는 호칭이란 건 둘 다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있잖아, 루이. 이탈리아행 비행기라는 거 생각 이상으로 길고 힘들더라."

"장시간 비행은 피곤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

"그래. 근데 겐지 씨라던가 한 번쯤 그 녀석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잖아."

 

끄덕이며 긍정한 루이가 그릇을 치웠다. 이탈리아에서 하루키는 손님 대접받기를 극구 사양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는 게 더 불편해요. 그런 말과 함께 일어나 설거지라도 도왔지만, 지금의 하루키는 자연스럽게 손님으로 대접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음엔 그쪽이 오라고 했어."

"나이로 따지면 이소이 씨도 어머니 아버지와 동년배실 텐데?"

"알 바냐. 능력도 있는데 알아서 하겠지."

 

설거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지만)를 마친 루이가 와인잔 두 잔을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새벽 기운에 물든 탓인지, 그저 이야기가 재밌는 건지 그는 통상 이상으로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루이는 하루키가 들고 온 이탈리아산 와인의 포장을 감상하며 무던하게 말했다.

 

"넌 옛날부터 보기보다 욕심 부리는 편이니까."

"내가?"

 

하루키에겐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지금은 그렇다고 치지만. 예전에도? 깜빡이는 시선을 마주하던 루이가 모르면 됐다, 하고 싱겁게 말을 맺었다. 말하는 와중에도 손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와인 오프너가 빙글빙글 돌며 코르크 속에 박혀들고는 이내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개봉되었다. 향긋한 냄새가 식탁 전체를 덮었다. 이젠 하루키가 턱을 괸 채 루이를 구경했다.

 

"이 시간에 자다 깨서 마셔도 괜찮아?"

"누구랑 다르게 나는 건강해서."

"야 인마. 나도 이제 건강하거든."

 

아마도. 자해하는 취미도 없으니 제 능력에 관한 부분은 하루키에게도 아직 미지수였다. LDL에 자문을 구하자 모르는 채로 살 수 있다면 그게 제일이라는 일갈이 돌아왔었다. 되겠냐고. 그러나 어느 쪽도 그를 배려한단 점만 틀림없으니 불평도 할 수 없었다.

 

“그럼, 건강한 아토 군.” 명백하게 놀리는 어조였다. 아직 따르지 않은 와인병을 든 채 루이가 바라보았다. “잔은 두 개다만.” 하루키는 화를 낼지 고민했지만, 반짝이는 잔에 홀려 하찮은 분노는 조금 접어두기로 했다.

 

“그럼 한 잔만.”

 

고운 색의 화이트 와인 두 잔이 때아닌 새벽에 빛을 받았다. 날짜는 지나버린 데다, 여전히 동은 트지 않았고,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지만…

와인과 함께 익숙한 인사를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루이.” 친우가 친우에게 건네고. “메리 크리스마스, 하루키.” 또 친우가 친우에게게 되돌려준다.

“그리고 해피 뉴이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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