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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켜놓은 TV에서 낯선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루키는 언어가 이탈리안인지 영어인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지만 익숙한 구성의 멜로디로 어렴풋이 캐럴이라고 짐작했다. 사실 어느 쪽인지 구분하는 쉬운 방법이 있다. 단순히 입을 열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다섯 명에게 '저기, 이 노래는 어떤 언어인가요?' 라고 묻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하루키는 그러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야채를 마저 썰며 국적 불명으로 남은 노래가 흘러가게 두었다. 냄비와 그릇, 그리고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호응했다.

비단 음악 뿐 아니라 모든 게 낯선 크리스마스였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지만. 몇 개월 전의 하루키에게 해외에서 휴일을 보내게 될 거라 말해도 그는 믿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탈리아에 있었다. 서너개월 전 처음 만난 남동생, 십몇년만에 재회한 아버지와 처음 보는 세 사람과 함께.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온통 처음 보는 광경일 땐 무리였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목재 벽을 흩던 하루키와 레이지의 시선이 맞았다. '괜찮으세요?' 입 모양으로만 묻는 레이지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줬지만, 여전히 신경이 쓰였는지 이후로도 두어번 눈이 마주쳤다. 하긴, 신경이 쓰일 만도 했다. 그는 하루키가 이런 크리스마스를 맞게 된 원흉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하루키의 참여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었고, 레이지가 물리적인 강제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으니 부적절한 단어 선택이었다. 다만 사교적으로 이어지던 대화 사이사이 찰나의 어색한 침묵이 끼어드는 순간마다 공연히 누군가 탓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고 말았다.

 

말이 나온 건 단풍도 다 져버린 거리가 단풍보다도 붉고 상록수보다도 푸른 초록으로 치장될 시기였다. 일본에 놀러 온 레이지가 둘만 남은 사이를 틈타 넌지시 물었다. "하루키 씨, 크리스마스에 계획 있으신가요?" "별 생각 없는데." 하루키는 질문의 대답을 이미 예상했지만 구태여 덧붙였다. "왜?" 그러자 좌측에서 레이지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가늘게 뜬 눈이 이렇게 묻고 있었지만 차를 마시는 척 무시했다. 능청스럽게 딴청을 부리면 한 대 때리고 싶다는 듯 표정에 그늘을 드리우면서도, 이내 가다듬고 멋쩍게 어물어물 설명하는 모습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는 스물여덟 살에 새로 생긴 남동생을 귀여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없으시면 이탈리아에 놀러 오시지 않겠냐고요. 다들 뵙고 싶어 하시거든요." 마지막 문장은 갈수록 음량이 줄어 끝에는 무음에 가까웠다. 특히 아버지가. 이 문장을 덧붙일지 말지를 고민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싫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대신 꺼낸 문장은 이 모양이다. 그제야 컵을 내리고 주변처럼 이르게 크리스마스 색으로 물들어버린 레이지와 눈을 마주쳤다.

썩 내키지는 않았다. 어른스럽게 굴 자신이 없어서. 레이지의 인맥은 넓지 않아 대화를 나누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필연적으로 LDL 멤버들에 관한 이야기가 섞였다. 만나본 적 없는 세 사람의 이름도 확실히 외우고 있었다. 애니, 드레퓌스 츠바이크, 그리고 세오도아.

그러나 개인적인 친밀감과 실제 만남은 별도 아닌가. 하루키는 첫 만남부터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고, 보통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곳엔 사네미츠가 있었다. 그의 앞에서 하루키는 온전히 아토 하루키로만 남을 수 없었다. 남자의 존재가 그를 몇 번이고 아토 하루키에서 이소이 하루키로 되돌렸다. 스물 여덟살의 사회인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는 어린아이로.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그는 불현듯 자제력을 잃고 다정함도 예의도 때려치우고 주변까지 곤란하게 할 발언을 뱉고 싶어지거나, 뱉었다. 사네미츠가 익살맞게 엄살을 부리거나 말을 돌리면서도 등 돌려 떠나가지 않는 모습을 연거푸 재확인하며.

솔직하게 말해 어리광이다. 생판 남이면 몰라도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는 LDL 사람들은 그게 어리광이란 걸 금방 간파할 것이다. 하루키는 그 점이 싫었지만, 동시에 둘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레이지를 생각했다. 레이지라고 제안이 쉬웠겠는가? 사네미츠와 하루키를 관찰하고 혼자 오랜 기간을 고민하다가 대수롭지 않은 척 대화에 슬쩍 풀어놓았겠지. 그는 또 동생이 가족의 눈치를 보는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으음, 그래. 갈게." 녹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가,

"대신." 짧게 흔들렸다.

 

레이지의 얼굴이 어떤 식으로 잘게 표정을 바꾸는지 느긋하게 관찰하다가 웃으며 덧붙였다.

 

"하루키 씨가 아니라 형이라고 부르면.“

"…하!"

 

음, 이건 객관적으로 그리 귀엽지 못한 표정이다. 그래도 그의 웃음이 옮은 얼굴로 레이지가 말했고.

"놀러 오세요, 형." 하루키는 거절할 수 없었다.

고로, 제안을 수락한 사람도 자신, 오토와 식구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휴가를 내고 이탈리아행 항공권을 예매한 것도 자신. 그렇다면 탓할 사람은? …아니, 그래도. 자발적으로 행동하고도 남에게 누명을 씌우고 싶은 순간이 있잖아. 하루키는 당근을 다지다 못해 가루로 만들고 있다가 오븐 문을 닫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생선을 오븐에 넣고 손을 닦는 드레퓌스는 요리보다 다른 일을 마쳤을 법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공연히 그의 농담에 움찔하는 게 아닐 것이다. 집 나간 정신이 빠릿빠릿하게 귀환했다. "그렇게 곱게 다질 필요는 없어요." "아, 죄송해요. 딴 생각을 하다가." "사과할 일은 아니네요. 어차피 소스에 쓸 거고." 도마에서 손을 떼자 누군가 도마를 집어 들어 팬에 재료를 긁어넣었다. 부스러기가 된 당근이 토마토소스 속에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 이내 도마는 또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한 차례 씻기고, 닦이고, 새로운 재료를 맞이했다. 주방에서 움직이는 사람만 넷인데 동작은 공장처럼 짜임새 있어 번잡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건 연거푸 이어지는 대화 뿐이었다. "그래, 애초에 손님은 앉아있으라고 했잖아." "그쪽이 더 신경 쓰이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확실히 레이지보다는 도움이 되네." "스승님?" "농담." 사실 진담이야. 하루키를 지나치며 애니가 작게 말하자 그는 방청객이라도 된 마냥 웃었다.

어색함에 관해 얘기했지만 사실 대화는 이처럼 끝없이 이어져 조용한 순간은 많지 않았다. 행여나 불편할까 봐 신경 써주고 있단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침묵은 서로 말이 엉킬 때만 가끔 내려앉았다가 피부에 닿은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레이지의 요리 솜씨에 대해 말하다가 그가 접시를 세 장이나 깨 먹은 어느 날의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그나저나, 대체 요리가 몇 개지? 하나, 둘, 셋… 미처 다 세기도 전에 새 요리가 추가되는 중이었다. 이러니 오후부터 시작한 요리 준비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을 만도. "매운 건 잘 먹나요." "음, 잘 먹지는 못해요." 드레퓌스가 꺼냈던 페페론치노의 반을 도로 집어넣었다. 지켜보던 세오도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레이지는 매운 걸 좋아하니까~" "맞춰서 평균 높아진 감 있지." "아토 군, 단 건 어때?" "그건 평범하게 잘 먹어요." "그거 다행이네. 모처럼이니까 판도로를 했거든." "레몬크림 얹어서?" "응, 전통적이진 않지만." "그 편이 더 맛있으니 됐잖아." 힐끗 레이지와 사네미츠가 냉장고에 과일과 푸딩 등을 집어넣는 모습을 목격한 하루키가 결국 접시 수 세기를 포기하고 눈 사이를 눌렀다. 필수 준비물이 소화제라고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아무래도 긴 저녁이 될 것 같았다.

 

요리 준비에 들어간 공을 알고 있으니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정말 노력했다) 음식 전체의 맛을 보자 더 들어갈 구석이 없었다. 결국 식사의 절반가량은 레이지가 먹어 치웠다. 나머지는 크리스마스 이후의 양식이 되기 위해 냉장고에 처박혔고. 식사 정리를 끝낸 뒤, 크리스마스 영화가 연속 상영 중인 채널을 틀어놓은 채 다 함께 카드 게임을 했다. "다 큰 어른 여섯 명이 뭐 하는 거람." "그런 말 해도 되나요? 레이지가 제안한 건데요." "……"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막상 시작하니 승리욕이 생겨 다들 꽤 열심이었다. TV에서 훈훈한 대사들이 쏟아져나왔지만, 누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정도로. 하루키는 표정 읽기 따위에 제법 통달했다고 자신했지만, 드레퓌스 앞에서 형편없이 무너졌다. 사네미츠는 예상보다 운이 나빴고, 세오도아는 성패에는 관심이 없는지 건성이라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오기있게 덤빈 건 애니 정도였으나, 여유롭게 승리한 드레퓌스가 시간을 확인하고 와인을 꺼내왔다.

 

나름대로 자제하며 마신들 취기가 오르는 걸 막을 순 없다. 술기운에 열기가 올라와 하루키는 바람을 쐬러 일어나 현관을 나섰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비교적 멀쩡한 (술버릇을 염려해 자제령이 내렸다) 레이지가 근처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던 중이었다. 찬 공기 속 희게 뱉어낸 숨에 담배 연기가 분간되지 않게 섞인 채 흩어졌다. "우왓, 춥다." "오. 바람 쐬러 오셨슴까?" 반도 피지 못한 담배꽁초가 대충 꺾어 신은 운동화에 짓밟혀 뭉개졌다. 달갑게 배려받으며 곁에 서자 옅은 담배 향이 스쳤다. "내일 분명 체할 거야." "좀 과하긴 했죠." "역시 그래?" "저희도 원래 이렇게까지 열심히 챙기진 않아요." 확실히 어제 지켜본바, 누구도 긴 심부름 목록에 익숙해 보이지 않았다. "그거 고맙네." "부담가지시라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요." "알아." 겨울처럼 청량한 웃음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다들 좋은 사람이네. 레이지가 잘 큰 이유도 알겠어." 이번엔 레이지가 웃었다. "제법 형 같은 발언 하시네요." "너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라고 한 거 아닌데 요?" "말은 잘해." "누구 아들인지라." 익살스럽게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에 하루키가 레이지를 가볍게 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깥 공기는 딱 제가 알던 겨울다웠다. 적당히 차갑고, 적당히 깨끗한. 지구 반대편이라도 계절의 감각은 변하지 않는구나. 하루키는 막연하게 감상했다.

 

"우왓, 추워!"

 

상념을 깬 건 익숙한 대사와 함께 등장한 사네미츠였다. "이런 날씨에 바람 쐬는 거야?" 젊구나~ 말을 덧붙이는 태도가 숨보다도 가벼웠다. 타고난 기질과 의도의 환상적인 협업이었다. 바로 그게 하루키를 자극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레이지는 사네미츠보다 하루키와 가까이 서있었고, 그의 미간이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다 빨리 목격했다. 눈썹 각도가 더 올라가기 전에 잽싸게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전 한 대만 더 피고 올게요."

레이지가 시선 밖으로 사라지자마자 무거운 침묵이 내리 앉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대도 사네미츠의 차림은 지나치게 간소했다. 애초에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신경 쓰였겠지. 하루키는 이해했다. " 그럼 난 먼저," "어딜 가세요." 다만 늘 그렇듯 이해와 자비는 별개였다. 먼저 다정함을 걷어찬 건 연락을 받지 않은 사네미츠 쪽이었으니 불평할 기회조차 없었다. 말을 댕강 잘라먹고 사람을 붙들어놓은 주제에 하루키는 팔짱을 낀 채 침묵을 고수했다. 사네미츠가 어설프게 날카로운 어리광을 받았다. "…불편하지 않아?" "당연히 불편하죠." "으음." 대화를 엿듣는 사람이 있었다면 금방이라도 분위기에 질식했을 것이다. 어색하게 웃으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자, 조금 더 침묵하던 하루키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년 연말엔 레이지랑 일본에 오세요." "응?"

전후의 침묵이 어지간히 길었는지, 몇 마디를 나누는 새 담배를 다 태운 레이지가 돌아왔다. 그가 복귀할 때까지도 사네미츠는 추위도 잊은 표정으로 굳어있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창백한데?" "술 때문 아니야?" 모른 척 핸드폰을 꺼내든 하루키가 오, 하고 짧게 감탄했다. 액정 속 시계가 딱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앞서 걸어간 레이지가 현관문을 열자 따스한 온기가 훅 세 사람을 덮쳐왔다. 돌연 봄이 찾아온 마냥. 동시에 누구랄 것 없이 크리스마스 인사가 튀어나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들이자 동생이 먼저 말했고.

"메리 크리스마스." 형이자 아들이 이었으며.

"…메리 크리스마스." 아버지가 마무리 지었다.

 

이어 안에서 기다리던 세 사람과도 연달아 인사를 나누자 흡사 합창같은 크리스마스 인사가 울려 퍼졌다. 어둡게 내려앉은 밤하늘을 몰아낼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부정할 수 없이 좋은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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