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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에게나 행복한 시절이 있다. 어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던지 간에 다시 한 번만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빌고 싶은 순간이 있다. 아토 하루키도 예외는 아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지나간 주말을 되돌려 달라며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참으로 평범하지 않은가. 그게 일상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가족의 존재를 안지 반년이 넘어갔으나, 아토 하루키의 일상은 그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가족을 만나기 전이나 후나 아토 하루키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미 그는 행복했다. 행복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지나간 주말을 안타까워 한다는 건 되돌아볼 여유가 있다는 것. 그는 매일매일 숨 가쁘게 달리느라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인간도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건 간에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여길 친구가 있으며, 취미 생활에 자금을 쓸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다. 충분하다. 행복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으면 안 될 점이 있는데 모든 인간이 그와 같이 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아토 하루키는 아주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다. 불우한 과거에 휩쓸리지 않고 건전하고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한다는 건 아주 고된 작업이거든. 세상 모든 게 노력으로 해결된다는 건 그럴듯한 궤변에 불과하다. 노력마저도 운이다.

 

그렇기에, 가끔 운 없는 인간은 현실이 아닌 과거에 머무른다. 그 장소에 일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변화에 흔들리는 삶은 당신다운 삶이 아니다. 얼기설기 쌓아 올린 탑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도망친다. 불안정한 생의 벽돌이 하나둘 갈라지고 떨어져 내리는 장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강박적인 아마추어 작가다. 불완전한 창조물을 직면하느니 차라리 도망치고 만다. 안정적인 과거로, 행복한 추억으로.

여자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2.

보글보글. 스프를 끓이는 소리와 함께 아토 하루키의 의식이 돌아온다. 집에 스프를 끓일 줄 아는 사람이 있던가. 아니, 그보다 사람이 있었나? 새초롬한 눈동자가 불그스름하다가도 호박색을 띄는 조명 아래서 고동나무처럼 빛난다. 약간 익숙하면서도 낯선 방이었다. 분명 자기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집안이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집도 아니라고? 직업병이 발동되기에 제격인 타이밍이다. 벌떡 몸을 일으키고 보니 침대가 원망이라도 하듯 삐걱거렸다. 180대인 그에게는 너무나도 작은 침대였을 뿐더러 머리맡에 수없이 많은 선물이 올려져있었기 때문이다. 글레이징 처리된 붉은 종이로 깔끔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와 눈사람 인형, ‘Merry Christmas'라고 적힌 캐릭터 케이크 상자, 녹색 천으로 꽁꽁 묶인 양말 뭉치 등등… 전부 이 나이 먹고 받아볼 줄 몰랐던 선물들이다. 침대 옆에 놓인 책상엔 산타 복장을 한 쿠키가 포장되어 있었다. 아, 맞아.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지. 혹시 레이지가 꾸민 건가? 크리스마스 파티라도 한다고 드디어 나를 납치한 건가?

주변을 둘러본다. 현실 감각이 돌아옴에 따라 향취 또한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는 위아래로 긴 방 구조가 이상하리만치 익숙하다. 작기도 작았는데, 선물이 없다면 텅텅 비었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허전하다. 최소한의 가구만을 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종체 감을 잡을 수가 없던 그가 이 장소를 알아차린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흘러내린 이불을 차곡차곡 개키는 중, 그 사이에 얼굴을 들이민 녹색 애벌레 인형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

 

기억났다. 이소이 하루키의 흔적이었다.

바보처럼 잠시 멍을 때리고 있자니 멀리서 들려오던 스프 끓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하루키, 일어났니?” 그 빈자리를 메꾸듯 기억이라는 정보값으로만 남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온화하고 단정하며… 이제는 그립기까지 하다. 문이 열린다. 홉 뜨인 망막에 세포의 속삭임이 스친다. 아마 외관을 잊었더라도 그가 누구인지 알기는 어렵지 않았으리라. 저런 목소리에 저런 눈으로 ‘하루키’를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죽고 사라진 이소이 하루키는 포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계승했고, 포도는 그를 토대로 아토 하루키를 만들었다. 뭉뚱그린다면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어린 이소이 하루키에게 보이지 않던 달의 뒷면이 아토 하루키에게는 보인다.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제3자의 눈이란 그런 것이다.

 

“좋은 저녁이야.”

 

어쩌면 그들을 타인이라 지칭할 정도의 차이점은 단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소이 하루키는 끝내 의문을 품을 수도 대답할 수도 없는 논제를, 아토는 통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랑의 부산물을 다시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소이 라이의 죄책감과 책임감마저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현무암을 얇게 저며 해안가에 뿌려둔다면 저런 빛깔을 띠지 않을까 싶은 두 눈동자가 온화하게 접힌다. 아토 하루키는 그 행동이 가면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유령이 찾아왔다.

 

 

3.

“놀라게 해서 미안해.”

“…아니, 아닙니다. 세상에 이런 일 저런 일이 있다는 걸 요 근래에 자주 느끼고 있어서 슬슬 놀랍지도 않아요. 초능력 같은 세포가 또 무언가를 했겠죠….”

“이건 꿈이야. 알고 있지?”

“자각몽이군요.”

“그래.”

“…….”

 

스프는 맛이 없었다. 문장 그대로 무맛이었다. 경험에 의거한 온도와 향기만이 희미하게나마 상기될 뿐이었다. 아마도 크림 스프일 액체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현재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아채니 그때서야 기시감을 눈치챌 수 있었다. 뭔가 많은 게 존재하는 것 같은데도 시각 요인을 기억으로 변환하는 영역까지 도달하는 건 중점적인 정보밖에 없다. 확실한 꿈이었고, 당연하게도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소이 라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정보 조각에 가깝단다. 죽은… 나의 소망, 의지, 심상을 담아, 동족 세포에게 전달되고 전달되어 네 앞까지 온 거야. 세포의 기억 전체가 이 몸에 적응되기까지를 기다렸어. 특히 너는 줄곧 부모라는 존재에 괴리감을 느끼고 있어서… 좀 더 시간이 필요했고.”

“그 말은 즉, 제가 이름뿐만이 아닌 이소이 하루키 자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군요.”

 

스프 대신 물잔을 든 채 웃고 있던 이의 표정은 흐려지나, 아토 하루키의 표정은 변함없다. 이미 한 번 자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장소에서 살아 돌아와 본 그에게 죽음의 은유는 조금 가벼울지도 모르겠다. 식탁에 컵이 닿자 스프의 수면에 잔물결이 일었다.

 

“그래. 나는 동포들을 경유하여 왔으니까. 아토 하루키는 알파로부터 기억을 계승했을 뿐이지. …하루키와 레이지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어.”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금 이 말을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4.

아토 하루키는 말없이 식탁에서 일어나 스프 그릇을 치웠다. 작은 냄비에 넣고 한 번 끓인 뒤, 두어 명이 먹을 정도의 양이 담긴 냄비 속에 남김없이 담는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냄비 위에 뚜껑을 얹으니 김이 서리며 더 이상 향기조차 나지 않았다. 평소라면 맛이 느껴지지 않아도 성의니 어쩌니 하며 잘만 먹었을 테지만 지금마저 성의를 따지고 싶진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도망치고 싶다. ‘하루키’에게 모진 말을 내뱉은 아버지를 참아냈다. 소속감을 위해 아들을 팔아넘긴 어머니마저 참아야 할까.

그릇을 싱크대에 넣고, 당연하다는 듯이 설거지를 한다. 이소이 라이는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안해.”

“이제 와서 말입니까.”

“그래, 이제라도.”

“….”

 

물소리가 멎어들고, 편안한 옷을 입어도 뼈가 도드라지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냐고? 솔직한 심정으로, 아토 하루키는 ‘처음부터’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 빌어먹을 사이비 종교 단체에 당신이 들어갔을 때, 호스트가 되었을 때, 아버지와 엮였을 때… 수많은 인과가 지나간다. 그러나 불안정한 숨소리는 그가 말을 고르고 또 고르는 중임을 증명했다. 당신의 삶을 부정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하루키 그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찾았다고 표현하는 건 역시 이상하네요. …이소이 하루키의 기억과 하츠토리의 비전을 물려받은 다음에 가장 먼저 짜증이 났던 건 역시 하라다 미노루 씨입니다. 하지만 가장 배신감을 느꼈던 건 당신이었어요.”

“그래… 그렇구나.”

“줄곧 묻고 싶었습니다. 왜 하루키를 연구소에 넘겼습니까? …아들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렇게나 바라 마지않았던 가족이지 않습니까.”

 

아이의 일생은 체념이었다. 오래도록 앓아온 병마에 체념하고, 아버지의 천대에 체념하고, 곧 다가올 죽음에 체념한다. 그 과정에서 희망은 사치다. 가족의 품과 연구소 바깥으로 나가본 적 없는 아이는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모른다. 이는 기회의 박탈이다. 그들은 열두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의 자율을 앗아갔다. 화를 냄이 마땅하다.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화내지 않을 테니까. 이소이 라이는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할지언정 연구소에 분노하지 못할 테니까. 헤매고 헤매다 도착한 곳이 하츠토리의 앞이라는 것만 봐도 뻔했다. 내 기억 속 당신은 언제나 방관자다.

 

“결국 내 나약함과 욕심 때문이었어.”

“….”

“호적상의 가족과 연구소라는 친가 사이에서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내 탓이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미노루 군과 결혼한 이후부터 우츠기 님과 그이의 사이가 나빠졌어. 어쩌면 당연한 거야. 미노루 군은 일반인이고, 우츠기 님은 지고천 연구소의 간부니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 여태까지 그이가 우리를 외면하는 걸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역시 사상적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던 거야. 그이는 신도가 아니니까. 결국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였어. 미노루 군과 함께 나가거나, 지고천 연구소에 남거나…. 하지만 나는 어느 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그 속에서 네가 생겼지.”

“…이소이 하루키는 희생양이었군요?”

“지고세포를 투여 받은 호스트와 일반인 사이의 아이. 지고세포가 유전될지 말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 하지만 유전되었다면, 선천적 호스트라면, 그 아이를 지고천 연구소에 넘긴다면… 그래, 참 못난 엄마지.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결국 네가 호스트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과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저를… 하루키를 사랑하긴 했습니까.”

“맹세할게, 사랑했어. 연민이 아닌 사랑이었어. 그것만큼은 하루키라고 할지라도 부정할 수 없어.”

 

 

5.

“더 악질이군요.”

“그러게 말이야.”

 

물컵이 흔들린다. 쓰게 웃는 여자의 얼굴은 단순 편린으로 취급하기엔 너무나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허구한 날 사고를 치는 말괄량이… 타인이 보내는 멸시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생존이 아닌 꿈을, 삶을 살고 싶었다. 신의 손을 잡고 도착한 장소가 에덴이었는지 침수된 세계 속 유일한 섬이었는지, 이젠 잘 모르겠다. 다만 사랑했을 뿐이다. 죄악감을 이기지 못하고 배신하고 말았지만 진심을 다해서, 그 장소를, 그리고 너를.

 

“…사랑해. 앞으로도 그러겠지.”

 

 

6.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아토 하루키는 여전히 등 돌린 채 바깥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나니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좋아 괜히 휘둘리지 말자고. 너는 아토 하루키, 내 이름은 아토 하루키… 근데 이 말도 저 사람이 했잖아! 욱 하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니 한밤중처럼 까맣기만 하던 창문 바깥이 점점 환하고 섬세한 정경으로 변화한다.

 

“…이건….”

 

창밖으로 우주가 너울거렸다. 이소이 라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유년기의 가정집이 종이로 꾸며낸 세트장처럼 뻣뻣하게 넘어가고 눈 덮인 툰드라를 닮은 온실이 넘어온다. “네 심상세계는 이렇구나.” 그는 살며시 웃음을 그러모았다. 직녀성과 견우성이 공존하는 밤하늘이 커튼처럼 온실을 둘러싸고 있었다.

 

“방금 전의 장소는 내가 만들었던 장소. 하지만 이제 주도권이 네게로 돌아온 걸 보면, ‘내’가 너의 지고세포에 융합되고 있다는 뜻이겠네. 정보라는 건 쉽게 잊히기 마련이니까. 으응… 대략 절반 정도 사라졌을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구나.”

“…사라지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군요.”

“그래, 모든 꿈이 그렇듯이.”

 

어디서 불어오는지조차 모를 바람에 밤이 나부낀다. 아름드리나무와 반질반질한 대를 타고 오른 포도엔 온실이란 말이 무색하게 소복이도 눈이 쌓여 듣도 보도 못한 꽃이 피어있는 듯 했다. 크리스마스라 그런가. 겨울을 흉내내면서 싱그러움은 봄을 닮아 있었다. 그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과 의자 두 개는 아무래도 눈에 띄었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포도나무를 바라보던 이소이 라이는 조용히 운을 떼었다.

 

“미노루 군은 잘 지내?”

“예에, 뭐. 아는 동생이 말하기론 연애도 해본 적 없다고 하고요.”

“그건 다행이네. 여기 아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당신은 힘이 강했죠. 예전에 아버지 때렸을 때 소리가 엄청 둔탁하던데.”

“어머, 들었어? 힘이 강하다기보단 때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거지만.”

 

죽은 지금에 와선 언젠가의 추억이다. 연보라색의 셔츠를 입은 여자는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눈 덮인 초목을 사부작사부작 발로 건들며 전에 들어본 적 없는, 피곤하고도 행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레이지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 셋이서만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있어.”

“드문 일이네요. 항상 바쁘지 않나요.”

“웬일인지 하루키도 아프지 않았고, 미노루 군도 일을 막 끝낸 참이어서 말이야. 연구원이 실수로 두 개를 사온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하나 받아왔어. 하얀 생크림 위에 제철 딸기가 여럿 올라가 있었지. 여러 조각 나눠서 돌리려 했는데, 하츠토리 님이 한 조각 받아 드시고는 우리끼리만 먹으라고 하셨어. 몇 번 들어보지 못한 명령이었지. 맛이 없냐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받아본 케이크 중 가장 맛있다고 하셨어. 레이지가 태어나면 한 동안은 상대적으로 하루키에게 관심이 덜할 테니 많이 사랑해주라고….”

“…좋은 기억 아닙니까? 목소리가 피곤한데요.”

“물론 좋았지. 미노루가 하루키와 돌아준답시고 장난치다가 내 머리 위에 생크림을 흘리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혼났겠군요, 그 사람.”

“엄청나게. 씻고 나온 지 3시간도 안 됐었거든.”

“성격도 지금이랑 다를 바가 없네요.”

“나이를 먹어도 철은 안 들더라고. 네가 생긴 이후엔 좀 의젓해지나 싶었건만.”

“하하…….”

 

넋두리에 가까운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더듬더듬 기억을 헤집어본다. 플래시백으로 떠올랐던 기억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었던 부분뿐이라고. 속으로 알파를 부르자 눈앞에서 포도 한 송이가 떨어졌다.

문득 그 연구소에선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게 떠올랐다. 연구원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실험체를 자극할지도 모르니까. 그들에게 캐롤이 허락된 공간은 오직 함께 기거하는 방뿐이었다. 케이크를 삼등분하고 와르르 웃는 가족 옆엔 오르골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타 캐릭터가 그려진 싸구려 오르골은 대강 5번 정도 돌리면 고장이 날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4번 정도 돌렸나.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허허실실 웃던 당신과 아버지의 얼굴이 스쳐간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동생과 아버지가 찾아옵니다. 아버지가 레이 군의 이름을 넘겨줬으니까, 제겐 양동생 정도 되겠네요.”

“미노루 군은 겁쟁이니까 다른 사람에게서 레이지를 찾진 않을 거야.”

“압니다. 예전엔 좀 걱정했지만 그 사람은 정말로 레이지를 아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네 아버지와 나는 닮은꼴이거든. 그러니 믿는 거야. 그 사람이 넘겼다면 내가 미노루 군의 입장이었어도 보물을 넘길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보다… 난 하루키가 미노루 군을 아버지로 받아드린 게 더 놀라워.”

“하도 치대서요.”

“넌 미노루 군을 꼭 닮았는데 이런 점은 나랑 비슷하구나.”

“설마 그 민달팽이가 치댔습니까?”

“우후후.”

 

 

7.

“자, 여행은 끝났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웃음을 그러모은 여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아토 하루키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휘청거리는 것도 잠시, 그는 웬만한 운동선수보다 더한 악력에 속절없이 끌려가고 만다. 당신은 거대한 커튼이 펄럭이는 온실을 종횡무진 달리며 이유를 알 수 없게 웃었다. 이제는 꿈에서조차 운동을 시키는구나. 누구들이 들었으면 좋은 현상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울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숨이 차지 않는다는 점.

앞을 봐. 고개를 들면 희미한 해의 일렁임이 보였다. 밤의 커튼이 뮤지컬의 시작을 알리듯 점차 거두어지고, 비어있는 공간을 새벽 공기가 메꿔 들어온다. 앉아 있었다면 아름드리나무와 포도나무에 걸려 잘 보이지 않았을 테지.

 

“곧 아침이 밝아와. 어느 정도 떠오르면 시야가 새하얗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태양으로 걸어 들어가렴. 그게 심상세계를 빠져나가는 방법이니까..”

“보통 당신이 나가는 거 아닙니까?”

“원래라면 그런데… 네 뒷모습이 보고 싶어서. 나는 아침 7시가 되면 사라지니까 먼저 보내려고.”

 

언제나 네가 내 뒷모습만 봐왔으니 이번엔 내가 아들의 뒷모습을 봐야지. 나쁜 엄마의 뒤늦은 후회라고 해줘. 미지근한 온도로 웃어 보이곤 한 걸음 물러서는 모습이 이별을 대변했다. 뭔가 나, 방금 전까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소소한 얘기를 섞어 꿀꺽 삼켜버렸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을까, 아토 하루키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내 것도 아닌 유년기 추억에 휩쓸려 정이라도 들어 버렸나.

어쩌면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찬란한 광채가 설경을 뒤덮고, 형광등 아래에서만 보던 얼굴이 자연광에 의해 희미한 윤곽을 덧그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남자는 웃었다.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진 않을 겁니다.”

“…응.”

“스스로를 이소이 라이의 조각이라 칭했으니까요. 뭣보다 후회가 죄를 덮어주진 못합니다.”

“응.”

“수많은 길로 속에서 당신의 환영이 제게 말했습니다. 부모를 미워해도 좋다고. 저는 이소이 하루키를 안아주지 않은 하라다 미노루가 싫고, 아들을 선택하지 않은 이소이 라이가 싫습니다.”

“맞아. 정말 미워해도 괜찮아.”

“하지만 내일 당신의 묘비에 들리겠습니다.”

“…….”

“크리스마스니까요.”

 

유령에게도 선물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좋게 생각하면, 이런 광경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하기도 합니다. 바람이 불자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공중에 휘날린다. 일이 바쁘기도 하고, 워낙 몸이 약한 탓에 쉽게 여행을 떠날 수조차 없는 아토 하루키에겐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당신을 용서하는 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이겠죠. 다만 지금은 지고천 연구소가 당신에겐 제2의 집이었다는 걸 인정할 뿐입니다.”

 

광명이 밝아온다. 머리 위에 태양의 고리를 쓴 그는, 신의 사랑을 받은 자. 이소이 라이는 크게 웃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일 게 뻔한데도 웃음 너머엔 우물거리는 속내가 존재했다. 저 애도, 나도 알고 있다. 어렸다는 게 면죄부가 되진 않는다. 다시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이소이 라이는 하츠토리를 따라가리라. 그것이 순리니까. 그러니 이 여자는 지옥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루키는 자신의 순리를 인정했다. 회개와 같이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는 얼핏 보면 냉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타인의 시각은 필요하지 않다. 오직 서로만이 온기를 체감하면 된다.

 

“이런 점은 미노루 군을 닮았네.”

“하아… 진짜 싫다.”

 

이소이 라이는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커버린 아이, 내 아이, 한 번도 우선순위로 두지 못해 미안하기만 한 내 아들. 과오의 호칭은 쌓여만 가지만 저 애는 빛으로 걸어 들어간다. 하루키를 위해 수많은 피를 보았으나 그는 역시나 후회하지 않았다. 감흥은 단 하나.

네가 그림자로 스러지지 않아 다행이야.

 

 

8.

“언제나 사랑해, 하루키. 안녕.”

“…안녕히 가세요.”

 

이것은 백일몽. 기다림도, 참회도 희게 사라져간다. 주인 없는 심상세계는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태양만을 바라보는 여자는 평소와 같이 기도를 올린다. 하루키, 언젠가 내 이름을 잊어도 좋아. 이 기억을 잊어도 좋아.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다만 네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누리다 가렴.

 

기도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내려앉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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